1분30초의 가을
1분 30초의 가을
가을의 길목이 활짝 열렸다
한 낮의 따가운 기운마저 가을의 숨결같다
행길 무성한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얼굴만큼 넓어져 햇살이 부서져 내릴 틈이 없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완연한 가을이건만, 나의 가을맞이는 미약하다
몸으로 부딪치지 못 하고 눈으로 훑기에도 미안함이 든다
세상 돌아가는 게 인간사 뿐 아니라, 나를 덧입히는 계절도 각박하다
시간을 갖고 겪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후, 사람으로 인해 세상 살만 하다는 말이 술술 나오고 계절마다 내가 하고 싶어 수첩에 써 논 걸
느긋하게 하나 둘 실천하고 지우는 맛을 알게 된다면 말야
하늘을 향해 누워 감았던 눈을 뜨면 얇은옷을 차곡차곡 정리해야 되고
농사를 지어 추수할 사람도 아니면서, 짧은 가을은 마음만 바쁘다
노랫말처럼 작사가가 고백했던 바람의 색은 파랑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사람들의 관심사 마다 무슨맛일까 무슨색일까의 의문은
노래가사 속 바람의 색 뿐 아니라 사랑의 색도 그러리라
이 계절에 사랑을 엮어서 다 내 얘기인양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노래들
가을사랑이니, 가을의 속삭임이니, 가을연가니,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이니 하는 노래 제목만 봐도
사랑은 가을에 바싹 붙어있다
가을은 빨간색 같고, 사랑은 연두색 같으니 파란 바람이 부는 빨간 계절에 연두빛 사랑이 탄다고나 할까...
풋사과 같은 내 가을사랑은 언제적인지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있었다면 이 빨간 계절에 군데군데 칠하는 법을 몰라 어색하게 연두색 점을 찍었을 거다
표시도 안 나는 작은 점들은 자고 나면 파란 바람에 휘이 날아갔을테고
연두색 도화지에 빨간 수채화를 그려도 모자랄 그 때 가을을 바보같이 놓치고 수없이 지나쳤지만
그런 게 아니면 지금 이렇게 밥하고 된장찌개 끓이는 가을밤이랑은 달랐을 것이다
거슬러 내려가면 해마다의 가을 58분짜리 단막극 중, 1분 30초가 또렷한 장면이고
나머지는 찾아내지 못하는 기억의 저편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지금은 56분 30초가 흘려 보낸 가을이다
후회와는 다른 기억의 저편 가을을 곱씹으며 사인사색이 한지붕 밑에 산다
풍요로운 가을에 태어났으면서 봄을 타는 나는
그렇다고 봄에 태어난 남편과 죽고 못 살 정도로 잘 맞진 않는다
난 저무는 가을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숙연해지고, 남편은 봄에 날아 다닌다
식성, 덮고 자는 이불의 두께, 막다른 골목에서 내놓는 생각까지 모두 다르다
기숙사에서 올라 올 때마다 하는 짓이 다른 겨울 태생인 아들
일년 열 두달 꼼짝도 안 하는 살을 뺀다는 여름 태생인 딸 제각각 춘하추동을 안고 태어났다
하늘 한 번 보고 물 한 모금 마시며 깊어가는 가을을 논 할 대상이 공통분모가 없어서 서운한 건 없는데
남편과 아들, 딸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에 관심이 없어도 괜찮고 불쑥 내뱉는 감탄사가 없어도 가을 하늘 아래 함께 있으니 괜찮다
선선한 바람이 냉정하게 흩어지고 시린 바람이 창문을 닫게 만들면
내가 올 해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조차 모르게 겨울로 가파르게 달려 갈 것이다
비록 미약하게 가을 맞이했지만 사랑앓이하듯 가을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도 아파하진 말자
생각 한 것에 반도 못 미쳤다는 조바심도 갖지 말자
서툴렀지만 1분 30초의 추억이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