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가린 그늘이 며칠 전엔 참 낯설고 추웠는데
따가운 햇살을 퍼부었던 오늘은 봄을 좋아하는 내게 최적이었다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
뭘 입을까 하는 고민으로 열릴 일이 별로 없는 옷장 문 앞에 서서
수필반 김종국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 둘 제치고 꺼내 입은 쉬폰 원피스는
자잘한 무늬의 여러가지 색이지만, 첫느낌은 검정색이 눈에 많이 와 닿는 옷이다
원피스는 내 몸에 제일 편해서 좋다
많이 걸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최소한의 것만 담을 수 있는
손가방을 꺼낸다
김선생님은 구로에서 도봉구까지 오실 분이라
20분 전 미리 약속장소에 도착했는데 내가 온 시간보다 20분 더 먼저 오셨으면서
오히려 "어, 정선생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라고 하신다
문화원 옆 벤치,
잠잠하다 짧게 한번씩 휙 몰아치는 달달한 봄바람이 차분했던 머리카락을 어지럽혀 놔서
가지런히 손으로 쓸어 올리며, 책을 읽다 이내 덮고 내 눈을 맞추신 선생님과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어선다
지금은 반이 갈렸지만
강의실 맨 앞자리에 같이 앉아 수강했던 옛 짝 김선생님의 메시지를
예기치 않게 늘 먼저 받을 때마다 참 죄송했는데 오늘에야 식사라도 할 수 있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몸따로 정신따로의 시간이 계속되며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이 날 더 자유하게 만들진 못 했다
집 밖으로 나가 전보다 더 홀가분하게 나를위한 시간을 갖게 되지도 않을뿐더러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진정 소중한 시간을 쏟는 수필반의 옛 짝 김선생님
건강은 어떤지,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등단을 했으면 좋겠다든지,
내게 늘 메시지로 건네는 한 줄을 접하면서
잠시 반성을 하고 움츠렸던 마음 한켠의 시간을 내 김선생님을 만난다
15년 정도 위일까 그분의 연세가 기억나지 않는다
여쭐 것도 없고 중요하지 않다
서로 다른, 마실 것이 담긴 컵을 한 손에 들고
보기에만 좋은 꽃가루가 날리는 창포원을 김선생님과 나란히 걸었다
재량학습으로 창포원을 메운 중학생들과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 바리바리 먹을 것을
챙겨 나온 가족들이 많아서 따가운 해가 얼굴에 닿아 실눈을 뜨지 않아도 될 만한,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고 적당한 그늘이 드리워진 의자를 찾긴 어렵다
천천히 반바퀴를 돌아 막 자리를 뜨려는 젊은연인의 앞자리에 양해를 구하고 앉는다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 나누는 얘기는 당연히 그 관심사다
내가 수강을 했던 봄, 김선생님은 여름과 가을 지나 겨울에 글쓰기 교실에서 만나
일주일에 두 시간 공부하며 세 번의 봄을 흘리고 있다
주변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지금보다 더 배려심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김선생님
상대방을 인지하며 맺어진 관계가 내 재산의 맨 꼭데기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나무들이 김선생님과 날 둘러싼 초록빛 창포원에서 내게 책을 권하고 책 속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일상에 급하게 변한 높낮이가 아닌 온유하며 좀 더 학구적인 변화를 시도하시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게 만든 군더더기 없는 말씀을 듣고 날 돌아본다
또 반성한다
언제였던가 딸에게 선물받았던 기억인데
읽지 못 한 채 책꽂이에 꽂혀있던 마이클 린버그의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 라는
책의 책장을 넘기셨다
반 좀 못 되게 읽은 듯한 책 맨 뒤 여러 장이 잘려 나갔다고 보여주셨다
"딸이 이걸 왜 오렸을까 궁금한데" 하시며 궁금증도 풀겸 한 권 더 사서 내게 선물하시겠단다
옴니버스 형식의 책 속 주인공들의 삶처럼
시간에 의미를 두고 평소보다 최소한 한 두시간 앞당기는 생활을 다짐하시는 김선생님
결코 게으르지 않은 나도, 같은 생각이라면 하루의 시작부터 몇시간을 앞당겨야 할까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세 시간을 당겨야 하고
아침밥은 물 한잔이니 밥먹는 시간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난 시간을 정해놓고 밥먹는 게, 그것도 세끼를 먹는다는 게 참 어렵다
시작부터 난항이다
글쓰기는 배우기 만큼이나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며 내게 등단을 권하시며
이미 등단을 하신 김선생님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올해 수필집을 낼 작업이 반 정도 남았는데 유종의 미를 거둬야 된다셨다
나에게 글쓰기는 등단이 목적은 아니라는 소신을 말씀드리곤 했는데
오늘은 그냥 듣기만 했다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 하는 짓이 일률적인 나는 그게 식상해서 큰 변화를 모색하지도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도전을 하지도 않는다
매너리즘에 빠져 사는 내가 발전이 없는 인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누구로 부터 그런 삶의 방식에 저평가를 당한 적도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다른 사람으로 부터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하는 게 잠깐의 혼돈을 주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우연한 기회에 김선생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돼
나 자신이 유연해짐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아, 하늘은 높다, 오늘 내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