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를 내리기 싫었다.
찬 바람이 살을 건드릴까봐.
그렇게 공중 화장실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지만,
잠시동안 한 낮의 즐거움은 기분좋게 차가웠다.
곧 잘 가는 4.19공원에서 전해지는 겨울의 시작은 생각보다 푸르렀다.
앙상할 것 같았던 당연함이 결코 아니었다.
입구부터 차가 늘어서 있는 행렬이었다면 겨울이 아니었겠지.
겨울을 뺀 나머지는 주차공간에 맞춰서 차를 들여 보내기 때문에 늘 줄이 길었다.
주차장이 널럴했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여유있게 주차를 하고, 알고 있는 곳의 자판기 앞에 섰다.
자판기도 동면하는 건지 커피는 미적지근 했다.
뜨거운 걸 잘 못 마셔서 오히려 좋았다.
아이들은 절기를 막론하고 감각이 없어 보인다.
여름에 흘러내리는 땀을 아랑곳 하지 않듯.. 겨울에도 움츠러드는 법이 없다.
대조적이다.
어른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움직임이 없다.
양지바른 곳의 벤취가 그들 자리다.
아이들을 한 참 주시했다가 다시 그 곳을 바라봐도 여전히 그렇다.
사이에 낀 내 나이 또래는 거의 삼삼오오다.
장난감 레일처럼 타원형으로 넓게 만든 산보길을 돌거나 부모님의 팔을 거들어 모시고,
손주처럼 보이는 꼬맹이들의 뒤를 바쁘게 쫓아다닌다.
나 처럼 혼자도 여럿이다.
근사한 사진기를 목에 건 중년신사는 보기에 치중하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진 않는다.
그런 사진기를 가진 사람은 각도도 꺽어가며 여기저기 눌러대기 바쁜데 그 신사의 사진기와
장소가 맞지 않는 건지 그냥 편하게 출사를 나온 건지 시선을 사로잡진 않는다.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이 홀로 어렵지만 정성스레 걷는 경우가 더러 보인다.
아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없고 혼자 운동이 가능하게 되서 혼자인 게 아닌가 한다.
중년신사와 달리 난 이 곳 저 곳 눌러댔다.
그 신사의 목에 걸린 사진기와 한참 비교도 안 되는 스마트폰이지만.
바람이 옷속으로 파고 들었다.
공원안의 파란 겨울과는 달리 제법 추웠다.
겨드랑이 사에에 손가락을 파뭍었다 놨다를 반복해도, 입으로 가져가 호호 불어도 안 되겠다.
마음먹고 있겠다 생각했던 시간을 못 채우고 차 안으로 바쁘게 들어갔다.
의자의 열선을 올리고 히터를 틀고 실내가 따뜻해 질 때까지 휴대폰을 유튜브에 연결했다.
집에 갈 때까지는 20분 남짓이지만 맹숭맹숭 심심하게 갈 필요는 없다.
당장 생각나는 여자, 못지않게 심취할 수 밖에 없는 여자 Barbra Streisand full album에 익숙하게 연결을 했다.
잠깐의 휴식은 사람을 만든다.
꼭 잠이 아니더라도, 게으름이 아니더라도.
끌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