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펴자니 그렇고 어중간한 비를 맞자니 그렇고
그렇지만 우산이 꼭 필요한 날
필요 이상으로 꽂혀있는 우산들 중 손이 가는대로 검정우산을 집었다
버스 정류장을 겨우 하나 지났는데 머리는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떠난다
약속장소엘 가야 하니 과감하게 내릴 수는 없다
이런 날..
잠깐이라도 좋은데
무작정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 걸 참자니 속이 쓰리다
바람 때문에
비와 하나되지 못 하고 발검음을 옮긴다
빛을 잃은 오늘
보이는 곳 모두 온통 습기 천지다
집을 나서기 전
돌돌 말아서 꾸민 머리끝은 죄다 늘어져 날씨처럼 가라앉고
대수롭지 않은 것들 뿐인 가벼운 가방인데 어깨는 왜 이렇게 무거운 건지
게다가 우산까지 짐스럽다
그런데 이런 건 부수적인 거고
비는 그렇다
시선이 허락되는 곳까지 관조하면서
뭘 전하고자 해서가 아닌데 걷다 그냥 멍하니 서있게 만든다
서서
내가 본 건 그런 행위만큼 특별한 게 없다
맨 끝에 동대문 역사박물관 지붕을 먼지섞인 잿빛 안개가 덮였고
빗물로 닦여진, 최소한 오늘은 우리 집보다 훨씬 깨끗한 도로
선명한 이정표
자동차
마음이 다 다르듯 각색의 우산을 썼거나 안 쓴 사람들
높낮이가 다른 건물들
그 밖에
숨어있는 다른 것들의 잔상까지 다 담도록 횡단보도 신호등은
겨우 두 번 바뀐다
그만 건너자
표시나게 비를 담고싶은, 하지만 잘 안 되는
흐리고 축축한 날
난 회색이다